우리 모두가 읽고 쓰는 법을 통하여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최명영은 인간의 공통언어가 될 수 있는 최초의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영역을 가로질러 더 이상 특정한 종족이나 나라에 매여있지 않은 언어를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상징을 담은 과거와 미래, 신화의 이야기, 공동체에 공유된 많은 이야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고 기록될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방법으로 ‘몸의 언어’를 되살리고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결합은 아니었지만 이 제휴는 상상이상으로 생산성이 풍부한 것으로,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narrative를 낳았고 인간의 비밀스러운 것을 보았고 감춰진 것을 드러냈으며 역사 이전의 이야기들을 가져왔다. 그것은 메시지를 보내거나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수준 높은 문자 해독의 새로운 세계를 연 것으로, 우리의 주변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는 언어로서의 문자의 힘을 의식하고 있으나 그의 작업은, 옛 사람들이 불교의 경전을 필사함으로써 깊은 신앙에 들어가려는 수행적 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숙련된 stroke을 통하여 의미를 담아내는 ‘몸의 드림’이다.
최명영은 누구보다도 많은 탐구와 축적에 의한 지식의 유용함을 깨닫고 의미 있는 언어체계를 위해 항상 ‘근원’을 향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 누구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몸의 언어를 계속 살아있게 했으며 인간 본연의 깊은 곳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근원의 마음을 담은 인간의 근본적인 텍스트들의 특징을 공유하면서 스스로의 언어와 방식으로 기억을 보전하고 불러낸다. 그 체험은 깊은 내면을 훨씬 더 깊게, 더 일관되게 하나로 엮어서 다양한 원천들을 모은 커다란 텍스트 덩어리가 되었으며 상이한 이야기들을 스스로의 입장과 가치관에 따라 자유롭게 수용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과 손으로 기꺼이 써 내려간 그의 작업은 독특하며 몸의 언어가 가지는 근원으로 향한다. 거친 방언들과 모순적인 가정들을 포용하면서 오랫동안 존재해 온 상습적인 언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맞대고 대화하는 하나의 장소성이 되었다. 최명영의 작업은 일반적인 문자체계와 달리 각각의 소리들로 나뉘지 않고 개념과 사물들이 한없이 겹쳐지면서 오히려 단순해지는 역설적 과정으로, 구체적인 발언 없이 오직 다양한 상황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담아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고, 짧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조용히 매일같이 주문하듯, 어떤 두려움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은 개념과 사물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는 법,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유로운 그의 사유방식이다.
그 방식은 말없는 그림자처럼 소리와 숨결로의 캔버스와 대화이며 각각의 상호작용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대화는 과정 전체에 일정한 형식과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뚜렷한 방향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그 바다에서 건져내어 창의적인 방식으로 배열하고 쌓아가면서 삶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명을 일으킨다. 지극히 평범한 캔버스와 물질을 통하여 우리의 시각을 끌어당기는 한편 그곳을 특별한 무엇인가로 탈바꿈시키는 그 방식은 고요와 적막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사물과 사유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최명영의 작업에서는 물리적인 재료나 그 부분들,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까지도 그의 의도와 함께 하나의 작업으로 동등하다. 구조나 비례까지도 암시적인 방법으로 물질과 의도의 연상관계를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의도마저도 원래의 의미가 배제된 상태로 희미한 메아리로나마 그것과 유사한 감각만을 부여할 뿐이다. 그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으며 그 용도를 분명히 알려주지도 않는다. 희미한, 유사한 감각의 연상들은 오히려 그의 의도를 강조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고 있으며 그의 의도의 원형들은, 실제의 것들보다 덜 구체적이지만 기억과 연관된, 기억에서 발아된 복합적인 재료들로 그 틀 안에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깊이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그것은 세월과 함께 간직한 하나의 원형을 떠올리게 하는 그 과정이 인간의 삶에 어딘지 위안이 되는 지속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양초 모양의 전기 조명을 보면서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빛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듯이, 최명영은 그의 작업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가 경험했던 과거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원형들을 찾아내고 체계화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현대의 사회현상을 표현하는 어휘를 만들어내면서 미적인 욕구와 함께 새 원형들이 된다. 그것은 보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언제나 다시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고 때로는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형의 부분들이나 사물이나 상황을 매우 치밀하게 관찰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이 알려주는 신호들을 포착하여 그의 방식으로 재조합 함으로써 보다 복잡한 수준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원형들의 속성은 유동적이므로 다양한 범주가 존재하며 그 포착된 각 부분들은 이 시대의 다양한 미적 형식과 대중문화들과 충돌되면서, 그의 의도에 의해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구조, 파편화된 물질들의 융합으로 강렬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들은 무엇이라고, 어느 때 라고 특정할 수 없는 과거나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붙잡을 것이 없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미세한 조정을 통해 사물과 사유의 원형에 현재적인 시의성을 부여하면서 본인이 알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버리는 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 그 원형들을 다시 검토하고 정제하고 핵심 요소들을 캔버스 위에 재설정해서 본질적으로 유용한 최적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가 찾아가는 원형들은 항상 변하므로 다른 원형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이미지로서 끊임없이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변신한다. 기능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식이지만 그 원형이 제공하는 것들은 실제하고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요소나 다양한 물질의 기능들의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각각의 원형들이 지닌 온갖 다양한 성격을 존중하면서, 5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간직하고 진화해 온 그의 기억을 하나의 원형으로 정의하기 위해 그 근원적 질문에 대한 실마리들을 현재로 불러온다. 그 다면적인 성격들이 분명히 이해되도록, 그의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감정과 불안, 그리고 기쁨들의 일상을 기록할 자연스러운 장소로 만들어 그것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 요소들로 환원시키고 압축하여 하나의 ‘평면조건’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아마도 의인화된 형식들로서, 보는 우리들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응하는 유전적 프로그램과 같은 방식일 수 있다. 그것의 유용한 기능은 그가 어떤 사물을 마주할 때 삶의 가능성으로 극대화하려는 자전적 선택에 의해 더욱 강조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억에 바탕을 둔 연상작용에 의지하여 물질의 부드러운 촉감이나 차가움, 햇빛이 느껴지는 질료의 디테일, 어떤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는 미묘한 색감들을 본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되지 않고 있지만 매일같이 접하는 공기나 음식을 요리하는 일상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에 반응하는 그의 감정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일상과 사물의 특질들이 각각의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면서 그것을 환원하고 그 모두를 동시에 활용한다.
최명영의 기억은 어떤 결핍과 연관되어 있는 듯 한데, 그것들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암호화되어 그 어떤 물질의 경우라도 진정한 울림을 지닌 물질로 변모되고 있으며 산산히 분해된 그 흔적들은 하나의 은유로 사용되어 그의 정신에 깊은 통찰로 기능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시각적으로는 인상적이지 않지만, 캔버스에 담긴 배려와 스타일의 정교함은 진부한 사물들이 평범함에서 벗어난 어떤 세계가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어떤 풍경이나 이미지를 엿보게 한다. 그것은 실제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모습, 또는 이상적이고 미화되는 삶에 대한 꿈일 수도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예민한 그 화면들은 물감들의 반응을 슬쩍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암울한 기억들을 흰색,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의 물감으로 지워낼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순간, 그 지워냄의 과정은 하나의 형식이 되었고 우리들의 시각적인 선입관을 재조정할 수 밖에 없게 한다. 나아가 모듈처럼 보이는 그의 반복되는 작업의 제작방식에 담긴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단순성”에 충격을 받게 된다. 평생을 하루처럼 제작해온 수행적 태도와 희미한 윤곽선으로 보일 듯 말듯한 그 화면은, 과거와의 결별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서적 울림이 깃든 소유물처럼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수행적·반복적 과정을 통해 무엇을 디자인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자기의 기억과 일상을 담아내는 목소리를 찾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몸을 훈련시켜 매일 매일의 일상을 담아내려는 그의 수행적 태도는, 겹겹이 이루어진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몸을 드려서만 가능한 ‘단순성과 독창성’을 만들어낸다.
최명영의 작업은 호사를 보여주는 과시적이거나 정교한 솜씨이거나 비싼 재료의 문제가 아닌, 시간과 노력이 반복되는 수행성과 인내의 희소성에 기초한다. 그 과정이 사라지면 그의 언어는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는데 달려있기도 하다. 이때 그가 추구하는 가치 또는 의도, 시각적 결과들은 엉뚱하고 희미한 도치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 도치들은 그의 작업을 오히려 개성이 살아있는 독특함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단순히 주형틀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닌 절제된 방식으로 매번의 상황이 달라지는 고도의 긴장감을 필요로 한다. 그의 집중은 작업의 불가결한 요소로 정교하거나 복잡한 것보다도 단순함을 만들어내는 곳에 있다. 그것은 오히려 오차범위를 허용치 않기 때문에 그 에게도 훨씬 가혹한 일이며 장식해서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유혹을 절제 해야하는 단호함까지 요구한다. 캔버스의 바탕(소지)과 만나는 지점에서, 물감의 수용성의 난만함에 적응하고 이끄는 지혜와 캔버스의 바탕과 물감 사이에서 보일 듯 말듯한 그의 동작 stroke은, 행위와 바탕 사이에 틈을 남겨둔다. 이는 아주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기는 아주 어려우며 미적으로는 우아하지만 구현 하는데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고 지루한 수행에 맞먹는 일이기도 하다. 가이드 라인이 없는 공간에 하나의 완성된 공간을 연출하는 것처럼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 행위이지만, 그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공기처럼 소유를 과시하지 않고도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절제된 표현을 유지한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기호들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그의 화면은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고 외로울 정도로 아주 제한적인 방식으로 주의를 물리고는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 하나의 형식만을 제공한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목적 자체가 되며, 보는 이에게 이미지를 전달하고 보여주는 일과는 무관하게 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캔버스 위에서 펼쳐지는 최명영의 동작은, 작업의 여려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물질과 사유의 양쪽이 서로 필요로 하는 양이성을 가지고 그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면서 가능한 한 시선을 끌지 않는 방식으로 장식이나 이미지보다 작업에 대한 그의 태도가 특징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긴장을 유지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방식으로 가장 내밀하고 가장 사적이며 가장 강렬한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다중적인 메시지를 제거한 특정한 색깔이나 질감으로만 제한하여 변화하는 흐름을 수용하고 소화하려는 포용성을 가지고 있으며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미디어와 표절물들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이 공급되는 근원에 주목하고 있다. 근원에 대해, 거기에 함축된 변화의 현상들에 주목하고 회화가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주변 세계에서 그 변화를 이끄는 힘에 주목한다.
최명영의 작업은 결코 가만히 멈춰있지 않은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동시에 여러 다른 순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다. ‘절제와 현란함’사이를 오가는 변화가 있으며 다채로운 것에서 무채색으로, 기억에서 미래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재료의 선택에서, 색상의 배합에서, 그리고 레이어적 작업방식 등의 모든것에서 우리의 인식을 당황하게 하는데, 우리가 그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방식이 본질적으로 환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미지보다 사유적인 측면들의 근원이 되는 여러 쟁점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관심이 존재하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독특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예술에의 본질이 있다. 일상적인 재료들을 가지고 유용성 너머의 세상을 환기시키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까닭은, 물질 자체에 내제한 고유한 특징들 너머 작업과정의 노력과 수행의 관점에서 그 자체가 그대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맥락과 과정이 그 핵심이 된다.
최명영의 작업 ‘평면조건’은, 독창적인 사물 언어로서 그것이 진행되는 바로 그 순간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무한한 공간과 끌어당김으로 ‘형식이 녹아든 과정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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