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트조선 개인전에 출품된 최명영의 작업은 종이를 지지체로 사용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래에 캔버스로 된 회화작품만 보아온 사람들로서는 작가의 색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최명영 Works on Paper≫전이다. 70년대 후반부터 창작의 발상과 프로세스에 대한 관심으로 국내에 드로잉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의 드로잉이란 완성작의 밑그림이 아닌 독립된 장르로 자리매김되었다. 특히 ‘Works on Paper’는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그의 작업 특성 면에서도 그렇고 지지체의 촉각적 성질을 살려낸다는 면에서 드로잉 작업의 성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종이작업은 발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은 아니어서 민낯을 대하듯 그다운 면모가 잘 드러난다. 종이작업에 대해 작가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제작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출품작이 1970년대 중반부터 2022년까지 근 50년의 시간대를 망라하고 있어 그의 작업 성격과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올 오버의 표면과 그 위에 생성된 오톨도톨한 점들이다. 색을 사용하긴 하지만 색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질료 자체의 관심 쪽에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의 작업이 몸짓의 흔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송곳으로 ‘천공’(穿孔)을 낸 것, ‘지인’(指印)에 의한 것 등 종이는 이 모든 것을 수렴해낸다.
기구를 이용하든 직접 신체작용을 가하든 몸짓의 ‘반복’은 그의 작업에 상수(常數)로 등장한다. 어떤 작가에게든 ‘반복적 요소’는 피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런데도 작가가 ‘반복’을 구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몸을 드리는 반복작업’이라고 부르는데 경전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처럼 그 또한 수행적인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작업하는 행위의 반복이 필사를 대체하며, ‘성품’(hexis)이 꾸준한 ‘습관’(ethos)의 결과로 길러지듯이 그에게 ‘반복’이란 습관을 자라게 하는 일종의 모판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복의 수행성은 그의 작업을 무미건조하거나 기계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질료가 지지체에 흡수되어가는 촉각적 성질과 악력의 강약, 완급에 의한 접촉감 등은 매번 다른 양상으로 펼쳐져 화면에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한편 일정한 형태의 구비를 그림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그의 작품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그의 작업에 대한 ‘시각적 문해’에 걸림돌이 된다. 그의 작품은 단번에 작품의도를 파악하고 인스탄트 식품처럼 쉽게 섭취해 버리는 유형과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과 함께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득하게 화면과 씨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참 동안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집에 돌아왔을 때와 같은 편안함이랄까, 친근한 것과의 만남에서 오는 느긋함, 특별히 가진 것은 없지만 자족감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단색에서 오는 담백함, 꾸밈없는 소박함은 그의 회화가 지닌 장점이다. 작가는 “부단한 소지와의 접촉, 노정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물질의 미세한 최소단위로부터 점진적으로 균질로 축적된 평면적 매스, 그 무표정한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나의 일상, 나의 정신구역을 통과한 ---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화면의 물질적 시각적 틀을 넘어 현존을 누릴 것이다”(작가노트중에서)고 말한다.
순전히 물질적 공간으로 보이나 실은 일상 경험과 의식 활동을 내포한 것이며 그런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표면에 가리어 ‘속에 감추어진 풍경’, 즉 이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가물거리는 이미지, 곧 길이 끊겼다가 이어지고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또 되살아나는 이미지 등은 우리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 있어선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앞에서 말한 일상 경험과 의식활동과 결부시켜 본다면 그것의 함의는 더 깊어진다. 파란과 모험이 없는 곳에서는 정서의 지형도 평평하고 탄력을 잃기 마련이다.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온 사람, 그리고 그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추상(追想)에 잠기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그림을 보면서 더욱 공감대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눈의 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공간 내에서 맞닥트린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려보고 삶의 궤적들을 점검하려는 의도가 작품에 내재해 있는 셈이다.
최명영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직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변화를 꾀한다. 천공과 문지르기에서 ‘붓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그 붓질은 무엇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붓질은 문자 그대로 부침을 겪는 신체작용을 실어내는 차원에 머문다. 그 결과 화면에는 그의 몸짓과 질료의 흔적만이 고스란히 남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호흡’이다. 작가는 ‘호흡’이 갖는 들숨과 날숨의 규칙적인 리듬과 같이 지극히 편안하고 느긋한 상태에서 ‘긋는 행위’(‘천공’과 ‘지인’을 포함)를 반복한다. 이때 화면의 표정은 그때의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 있겠으나 좀처럼 자아를 드러내는 법은 없다. 질료와 행위의 절묘한 균형이라고 할까, 조셉 캠벨(Joseph Campell)이 말한 ‘살아있음의 경험’이 두드러지게 된다.
딱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래전부터 그에게 그림이란 ‘사색의 장’으로 자리잡은 것같다. 폴 발레리(Paul Valery)는 종종 내면을 성찰하는 동안에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이 꼭 그렇다. 작가는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현존과 삶의 결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인체의 호흡이고 신체의 미묘한 움직임이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는 없지만 절제되고 소탈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내면의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온 생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삶이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삶의 긍정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작업도 그런 삶의 물결에 맡김으로써 그속에서 무슨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들어보려고 하는 것같다. 알셀름 그륀(Anselm Grün)은 우리가 고요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영혼 안에 우주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역시 우리 안의 무언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바람이 아닐까?
산책이 일상에 활력을 안겨주듯이 작가가 보여주는 소박한 삶의 태도는 마음의 탄력을 원활하게 해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유용함’보다는 ‘존재 자체’, ‘소유’보다 ‘향유’, ‘분주함’보다 ‘평정심’의 유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후자에 속한 것들은 손쉽게 우리 손을 빠져 나가는 문제점을 지닌다. 삶이 앞의 것들을 체험하기 위한 항해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의 예술은 이러한 항해 의지를 확고히 해준다. 따라서 소박한 삶을 지지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보는 이에게 소박한 삶의 태도와 미덕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욕망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의 가능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면 최명명은 바로 그런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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