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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행위, 질료 그리고 평면조건

최명영의 <평면조건>에서는 이제까지의 그의 작업 변화 과정이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색체의 단순화를 통하여 섬세한 질료의 변화를 화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며, 화면 위의 질료의 표정은 행위를 내포함으로써 형상성을 초월한다. <평면조건>에서는 표상적 의미 작용을 살펴보면 물감의 질료적 특성이 표면으로 강하게 나타나게 되어 작가의 의도가 질료의 작용에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미술 작품을 일종의 질료의 실재성으로만 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거나 작품 외부로 드러나는 시지각적 현상의 의미 해석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각적 유서성의 함정으로 인하여 의미 전달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작품 해석은 ‘작가의 사유’와 ‘작품 자체’의 상관관계의 함수로 볼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행위와 질료의 조합으로 사유가 고정되는 실체이다. 그러나 작품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선험적 지식에 의존하여 해석되어진다. 어떤 대상을 작품으로 인지하는 과정은 그것이 지닌 시각적 직접성을 넘어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선입견의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성찰의 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가 사고하는 만큼 관람자도 작품의 내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최명영의 <평면조건>을 수용하는 데는 마찬가지의 성찰이 필요하다. 그의 <평면조건> 시리즈가 이루어지기 위해 장시간의 사유의 시간이 있었음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이 시리즈는 이미 77, 78년에 시도된 <한계내외>, <단위면적>, <전개면적>에서 공간과 평면의 이중성을 제시하는 방법에서 발단이 되었다. 화면의 표면 위에 반복적인 색칠과 배면에서 두드리는 작업, 반복된 색칠 작업의 결과와 병행하는 제한된 화면의 표면 위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물감의 작용, 화면 위를 일정하게 구획을 짓고 그 단편들이 이루어 놓은 전체 면의 상황 등, <평면조건>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평면조건>에서 물감의 질료적 특성과 물감 칠하기 행위의 일치를 시도하고 있는데, 물감을 단순히 평면 위에 고착시키면서 형상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의 제작이라기보다는 평면 위에 반복적으로 겹쳐지는 작가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인 작용을 암시하게 된다. 이때 물감은 평평하게 화면에 펼쳐져 물리적으로 화면을 점유하는 방식과 함께 질량감과 깊이를 형성하게 되고, 화면의 가장자리로 물감이 밀려 나가는 작용에 의해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일정한 평면과 사각의 제한된 틀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공간과 물감의 상호작용을 의도한다. 물감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사각형이 존재하지만 그 위로 행위의 반복에 의해 물감은 밀려나면서 사각의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는 작업이다. 이렇게 물감이 밀려나는 과정은 행위의 결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게 된다. 그때 질료가 지닌 색상은 의미를 제한 받게 되는데, 즉 모노크롬을 이루는 것이다. 작가는 물감의 색상적 가치를 제거함으로써 색상의 변화에 의한 작품 해석의 개연성을 억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중성적 색채’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 당시 색채의 의미는 시각적 현상으로서 無에 가깝다.

 

86년 이후 <평면조건>에서는 색상이 드러낸다. 이때 가는 붓자욱을 강조하는 색상의 역할은 형상의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모노크롬의 범주 안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다. 색상은 붓자욱의 전후에 놓여진 상황을 제시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칠해진 붓자욱은 그 위에 겹쳐진 붓자욱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오게 되며, 거의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행위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계속 나타나는 내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평면조건>에서 물감의 역할은 평면의 실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 질료에 가해진 작용을 시각적 현상 이전으로 환원시켜 작가의 ‘사유’와 ‘행위’를 일치시킨다.

 

이러한 물감의 물질적 현상은 회화 표현과 그 以前의 ‘인간의 감성과 물질의 만남(이일, 개인전 서문, 86년)’에 대한 사유로서 제시된다. 대부분의 색채 역할은 제거되어 모노크롬의 시각현상으로서 보이는 그대로 이상의 내재성을 갖추게 된다. 즉 최명영의 작품과 같이 지각의 조건적인 평면은 단순히 회화적 기호의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평면의 평면성과 질료만을 드러내는 모더니스트의 형식주의로 오인하기 쉽다. 작품을 시각적이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감성’으로서 사색되어진 평면성은 수용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시기적 연속성에 의한 기호의 상관관계를 지닌 작품을 단일한 시각적 조건에만 적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해석은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에 의미를 두어야 하며, 그 방법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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