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14호, 1972년
1
지난 연말, 전위적인 모임으로 지칭되는 한 전시회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바 있다. ‘탈·관념(脫·觀念)의 세계(世界)’라는 주제가 의미하듯이 오늘의 미술이 관념 일변도의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지각대상으로 표명 되어질 수 있는가를 실험코저 한 전시회였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작가 개개인의 긴박한 문제점의 응결체로서. 때로는 충분히 여과되지 못한 채 생경한 제시(提示)로서, 또는 확고한 시각적 대상의 존재성을 입증하는 것들로서 한결같지 않은 발언을 통하여 우리의 저변을 흐르는 의식의 실체를 확인하여 이를 실현코자 한 것이었다.
한결같지 않은 발언이라 함은 현대적 창작 행위릐 특징이기도 하려니와 그것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는 개개인이 갖는 현대에의 포인트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말하며, 그것은 하나의 주된 양식(편의상)을 형성하기 이전의 실험예술이 갖는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흔히 실험은 결과에 대한 가능성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적인 실현을 예감케하는 무수한 행위의 반복으로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진정 새로운 의미의 예술은 과학에 있어서의 실험과도 다른 것으로 과학자들은 합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심오한 것을 가려내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이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실험에 한해서는 이와 같은 명확한 시금석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늘의 현대미술을 포함한 모든 시대의 전위예술의 소위 시끄러운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찍이 예술이 그 첫 출발(태동)에 있어서 자연발생적이건 어떤 필요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건 간에, 역사의 어떠어떠한 시기에는 규격화된 의식, 공식화된 조형 논리 및 방법, 전제된 효용성에 알맞게 가공되어왔고 어떠한 짧은 찰라에 번쩍하는 섬광과도 같은 새로운 의식에 의하여 전혀 다른 상황으로 줄달음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실제로 다다의 선언과 행위에서도 그러한 실례는 나타났던 것이며 그것은 미래 인류 문화의 행방을 크게 판가름할 것이기도 하다.
누가 현대를 혼돈의 시대, 위기의 시대라고 지적했던가. 그것은 누구랄 것도 없이 현대가 혼돈의 시대이며 위기의 시대이자 정당한 가치관을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시대인 것 같다는 징후가 우리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술이 그 시대의 증언이자 의식의 반영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혼돈의 시대에서 호흡하고 있는 현대적 예술가의 초점은 필연적으로 현실과 맞부딪치게 되는 것이어서 그것은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지상(至上)의 명제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국면에 처해서 현대적 창작을 이룩코저 하는 전위적인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현실을 거의 전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을 휩쓸고 있는 이념과 현실, 즉 현실적 창작 의지와 전통 관념과의 갈등은 그들 자신의 표현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고 지적되어지는 바와 같이 때로는 파괴적이며 시위적(示威的)이어서 예술의 극단적인 종말이라고 비판하는 해프닝과 같은 창조적 행위까지 서슴없이 감행되는 것이다.
창작을 위한 이러한 갈등을 평론가 이일 씨는 그의 전위예술론에서 하나의 구속이요 제약으로 규정하면서 “전위가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이요 전적인 자유이요, 요컨대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지’라 할 것이다”라고 하고 계속하여 “그러기에 전위적 움직임이란 하나의 완성된 양식을 지향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하나의 뷔르뛰알리떼(Virtualité)로써 온갖 표현 형식을 통해 스스로 확인하려고 한다. 어쪄면 그것은 가시적인 또는 구체적인 표현을 거부할 수도 있으리라. 그때 전위 ‘정신’은 순수한 정신 상태로 머무르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 그 자체 또는 창조라는 관념과의 연관 속에서 일종의 ‘침묵의 소리’로 메아리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당면한, 그리고 또한 앞으로 수없이 당면해야 할 문제를 대충 열거했거니와 우리에게 과연 전위예술, 전위 작가로 불리워질 사례가 존재했던가, 만일 존재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떠한 양태로 우리 앞에 보여졌으며 이에 대한 객관적인 제 반응은 어떠했던가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떠들썩한 의미의 전위, 그것을 과격한 데카당스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농후한 현실적인 감각으론 쉽게 시인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겠으나, 사실상 우리에게 있어서도 간헐적이긴 하나마 전위예술과 의지에 충만한 작가는 있었던 것이다. 50년대 말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던 작가들이 그러하고, 그 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집단 혹은 개별적인 제 실험에 참여했던 작가들 역시 어떤 의미에서건 전위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일부, 아니 대체적으로 우리 현실이 전위에의 환경적 여건과 소지(素地), 그 실험의 양상을 들어 그 근원적 부정성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견해는 우리가 시정해야 할 가장 선결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우리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어서 쉴 사이 없이 변전(變轉)하는 미학(조형적 설정)이 어느 일정한 곳에 머물렀을 때 비로소 이에 대한 안정된 조형으로서 긍정적인 해석을 내린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항상 조형은 있으나 시점에 처한 현대적 의식은 결여되는 결과를 낳게 마련인 것이다.
대체적으로 인간은 ‘변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감’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때로는 막연한 변화를 기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실제에 있어서 자연을 위시한 모든 사상(事象)은 변한다는 데에서 그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변의 개념이야말로 모든 것의 정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볼 때 우리에게 체질적인 것으로까지 보이는, 어쩌면 그것이 유교적 전통에서 연유한 것인지 아니면 그 외에 어떠한 요인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변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감’은 어느 민족, 어느 시기에 비교할 것도 없이 가장 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제반 상황하에서는 앞에서 말한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지”는 자칫 왜곡된 공허한 행위로 받아들여지거나 단순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결과에 그려버리게 될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행동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 싸르트르의 견해 “인간의 가능성이란 시간적으로 미래이고 방향적으로 미래지향적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인간의 미래 가능성은 무한한 자유로서 전개될 것이다”라는 다소 피상적이긴 하나 호소력 있는 견해에 유의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2
얼마 전 한국의 한 저명한 컬럼니스트는 현대의 예술을 다룬 에쎄이에서 “현대의 예술이 생활 대중과의 공동적인 체험 속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단절된 밀실의 체험을 기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예술은 스스로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고 만 것이다. 예술은 이제 대중을 이끌어가는 교사도 아니요, 대중에게 쾌락을 주는 창녀도 아니다. 결국 그것은 현대의 폭우를 막기 위한 사설 피난소, 한 개인이 머무를 수 있는 달팽이의 껍데기 같은 존재다”라는 알쏭달쏭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의 예술이 대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다분히 과거와는 다르게 생활 대중과 유리된 양상을 띠고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정립할 수 있는 시재(時在)에 미쳐 다다르지 못한 실험과정인 채의 현재로서는 조급한 요구가 아닐까 한다. 또한 오늘에 있어서의 예술가의 체험이란 그 어떤 식의 제한된 특수한 체험이 아닌 것이며 밀실의 체험은 더욱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현대를 가는 건강한 생활인 ‘만일 현대가 위기에 차 있다면 위기에 찬 대중의 일분자(一分子)’로서의 체험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러한 전제하에서만이 현대의 예술은 규명되어질 것이다. 다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 현대예술이 대중과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확한 것이어서 방자망 크레미외 같은 이는 “대중을 현대예술로 이끌어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대예술이 인간에 대하여 고전예술이 모르고 있던 새로운 계시(啓示)를 부여해준다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즉 시적 흥미 이외로 정당한 인간적인 흥미를 띄게 하도록, 현대예술에 심리학적, 도덕적인 의의를 부여해주는 일이다”라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모순점을 들어낸 이상론에 그친 견해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현대예술, 특히 강력한 도전적 실험 정신을 기조로 한 전위예술의 경우 거기에는 이미 뚜렷한 현상의 하나로서 예술적 자율성의 관념이 무너져 있어서, 당분간은 그 자체의 미학적인 한계마저도 구획 짓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며, 둘째 오늘의 예술이 지난날의 예술이 지니는 인간에의 단순한 향유성(享有性)내지 효용성과는 그 질을 달리하는 차원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대예술을 심리학적, 도덕적인 의의로서 구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심리학적, 도덕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조차 퍽 애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칫 그 기준은 과거적 척도일 수 있겠기에 말이다. 어쨌든 현대예술과 대중의 관계 개선은 항시 요청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는 이러한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지나친 무감각성으로, 때로는 혐오에 찬 편협한 안목으로 이를 관광하는 것을 대하게 된다. 나아가 이와 같은 관망의 태도는 때로는 돌변하여 전혀 엉뚱한 관점과 방법으로 대중과의 관계를 차단시켜서 오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전위에 대한 또 하나의 적이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잠시 비친 바 있는 예의 전위를 지향하는 실험적인 전시회에 대하여 한국의 권위있는 모 일간지는 그 문화란에 이를 기사화함에 있어서 이러한 전람회가 “무슨 도움을 주나?”라는 그야말로 커다란 그로테스크한 타이틀 및에 인상기도 아닌 미술평으로 보기에는 지나친, 소감(笑感)으로 쓰여진 것 같은 글을 작품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평자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책임질 수 없는 단순한 흥미 본위의 기사 아니면 대중적 계몽을 시도한 글로 보여지기도 하나, 그것이 지난 10여년에 걸쳐 한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한바 공이 지대한 언론 기관의 문화면에 실린 글이고 보면 당혹함에 앞서 실로 중대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점이라 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한결같이 하나의 우스갯소리의 허황된 행위와 행위로 비쳤을까 하는 기사 내용에 그 근본이 있지만 아울러 그 타이틀이 의미하는바 전위예술에 대한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중 앞에 어떠한 사실을 오도할런지도 모를 보도자세를 지적한 것이기도 한다.
“무슨 도움을 주나?”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도움’이라는 단어를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필요’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고 보면 “무슨 필요가 있나?”라는 전면적인 부정의 형태가 된다. 물론 이러한 한 줄의 문구가 모든 전위적인 창작인의 의지를 박탈하고, 전위에의 실험 자세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매스콤의 마력에 편승되었을 때는 대중적 반응은 결코 경미한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요(要) 현대예술과 대중의 관계를 가능한 선까지는 이끌어야 할 사명으로 볼 때, 무지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지나친 감이 드는 것으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사실 보도에 충실을 기하는 편이 한층 바람직한 것이다.
“무슨 도움을 주나?” 라는 의문에 접했을 때, 우리는 예술의 특성 및 기능에 대한 구태의연한 소비적인 사고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야 할 필요를 통감하게 된다. 오늘에 있어서 예술은 결코 감미로운 향유물이나 미적 감흥만을 제송하는 위안물에 그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일찍이 허버트리드는 그의 『Art and Society』중에서 예술의 본질적 성질을 “우리의 실제적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생산 또는 종교적 내지 철학인 사상의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종합적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갖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적 능력”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예술이 그 어떤 보상을 전제(前題)도 하여 이룩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작가의 ‘조형하려는 의지’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며 그 의지는 현대적인 작가의 체험과 직관, 끝없는 실험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조형에의 의지’, 그것은 현실을 지켜보는 눈(眼)이요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이며, 현실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현실을 이상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의 올바른 실현은 작가와 대중, 단절의 관계를 이어줄 교량 역(役)이 모두 한결같이 인습의 허울을 벗어던겼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 존 케이지의 다음의 말로서 요약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소리가 소리아며 인간이 인간인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감정의 표현도 질서 관념에 관한 착각도 혹은 여지껏 계승해왔던 심미적 추종도 이를 모두 벗어버리게 된다.”
[······]
어떻게 보면 성공한 것 같기도 한 전위에의 실험들, ‘아직 세계 곳곳에 만연되어 있을 전통적 미의 이상권(理想圈)’밖에서 수행되고 있는 실험들은 그것이 ‘위기의 예술’이든, ‘거짓의 위기’(토마쓰 헤쓰)이던 간에, 이미 우리 시대의 예술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시점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로 보여지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예술이 현대의 모든 지역의 예술로서 한결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겠으나, 그것이 어떠한 경로로 우리 몸에 부딪쳐왔던지 간에 우리 내부에 어떤 진동을 감지했다면 과연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어떠한 씨앗이 발아하는가를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옥토(沃土)가 아니고 밝은 태양이 없고 재배자마저 없는 나무여서 풍요한 결실을 맺기 어려운 경우라도 스스로 각고와 인내로서 더 큰 열매를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나눠 줄 수 있도록 계속 분발해야 할 것 같다.
Bình luậ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