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해 전 가을에 문득 “散策”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그 담담한 反復-回歸가 지니는 의미에 주목한 바 있다. 반복되는 우리의 日常事나 備忘錄의 온갖 約束, 예기치 않았던 事件들은 실상 온통 点과 点 그 자체로 인식 될 뿐 아니라 그 点과 点의 間隔 또한 설명키 어려운 模糊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나는 여기에서 그 間隔을 ‘模糊함으로 가득 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은 그 모호함이야말로 바로 쉼 없는 호흡과 肉身의 움직임으로 充溢된, 그 어떤 事物 想念에도 묶이지 않는 바로 自身의 存在 그 자체가 아닐 런지? 自身으로의 回歸를 가능케 하는 산책의 의미야말로 나의 작업의 기본적인 정신과 같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1976年이래 「平面條件」題下의 나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조로움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몇 가지 條件이 前提되고 있기는 하나 素地, 媒体, 行爲는 물론이고 펑퍼짐한 작품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變調의 드라마나 특기할 제스츄어도 찾아 볼 수 없겠기 때문이다. 단지 캔버스위에 日常的 삶 그 自体, 온갖 기억과 想念마저도 묻어가면서 그 推移에 따라 새로운 存在의 地平을 열고 저 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平面條件」은 한 마디로 繪畵로서의 숙명적인 平面性을 그 궁극적인 상태에서 어떻게 繪畵化할 것인가 하는 데 있으며, 보다 기본적인 평면에로의 접근을 겨냥하여 몇 가지를 상정하고 있다.
우선 캔버스의 크기와 형태의 문제로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캔버스의 크기는 身體行動半徑의 한계와 필수적으로 연관되고 있다. 말하자면 선 자리에서 팔을 뻗어 화면의 上下左右辺 사이를 한 호흡으로 往復운동 할 수 있는 크기이며 따라서 畵面형태도 대개 正方形이나 수직 장방형을 피하고 水平長方形의 캔버스를 素地로 삼고 있다. 身體行動半徑에 부응하는 水平長方形의 캔버스를 선택하는 데는 아마도 자신의 心理的인 요인과 함께 均質한 화면에서 하나의 초점, 즉 中心을 허용치 않고 視點을 화면과 함께 移行하도록 유도함으로서 平面을 평면 그 자체의 또 다른 存在로서 더듬어 확인하려 하는 繪畵觀에 기인하는 듯하다.
平面의 繪畵化를 위한 또 다른 결정 요인은 바로 모노크롬에 있다. 대개 중성적인 白과 黑을 택하고 있는데 여기서 中性的이라 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색채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로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의 모노크롬은 그 색체 성격적인 측면보다는 質料 자체의 推移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이 바로 자신의 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반죽상태의 生梗한 오일칼라는 로울러나 붓, 나이프 등으로 평면위에 가급적 均質하게 反復塗布하면서 화폭의 限界 밖으로 밀어낸다.
不斷한 素地와의 접촉, 노증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물질의 미세한 최소단위로부터 점진적으로 均質로 축적된 平面的 매스, 그 무표정한 틈바구니에서 나는 나의 日常, 나의 精神區域을 통과한 하나의 世界로서의 平面構造와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畵面의 物質的 視覺的틀을 넘어 그 現存을 누릴 것이다.
최근의 일련의 작업은 종래의 單一平面의 構造化로부터 수없이 분할된 單位平面을 다시 묻어가면서 全體化하는, 말하자면 平面的 非平面化라는 나의 회화적 가정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歸納的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1986. 2
崔 明 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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