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崔明永의 「平面條件」에 대하여 –
「平面條件」이라는 명제를 놓고 崔明永이 작업을 계속하여 온 지가 벌써 10년을 헤아린다. 「平面」 주지하다시피 이 평면은 회화작품에 있어서의 제일 조건이다. 그리고 19세기 말경, 한 폭의 회화작품이란 「본질적으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고 선언한 모리스 드니의 유명한 정의(定義)이래, 회화는 보다 의욕적으로 또 단호하게 평면이라는 조건에로의 회귀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왜 새삼스럽게 「평면」인가. 崔明永은 다름 아닌, 이 새삼스러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는 새삼스레 한 회화작품을 평면으로 규정짓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또는 평면을 하나의 회화작품으로서 조건짓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여 崔明永에게 있어 그의 작업의 의미는 회화의 평면화의 문제에서 평면의 회화화(繪畵化)의 문제로 이행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행은 오히려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다시 말해서 회화작품이 비록 본질적으로 평면이기는 하되, 평면이 곧 회화작품일 수는 없다는 인식의 논리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崔明永은 회화작품으로서의 평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회화의 「평면성」을 가능한 한 침범하지 않는 최소한의 것으로 규제하고 있다. 모든 일루젼적인 요소, 예컨대 색채, 선, 형태, 구성 등은 물론이려니와 행위의 노출, 마티에르 효과 등을 극도로 억제한다. 나아가, 그는 작품의 크기까지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崔明永은 그의 모든 작품의 사이즈를 「신체적 한계」내의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경우 옆으로 길다란 그의 장방형의 화면은 좌우 폭이 양팔을 펼친 넓이, 위아래 폭은 뻗혀진 한 팔의 길이를 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화가가 정해진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고 정지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그 정지상태가 그리는 행위의 「중립화」를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崔明永의 작품이 균질적인 모노크롬 회화, 그것도 전적으로 흑과 백 이라는 무채색 모노크롬 회화 (한때 그는 붉은 순색의 모노크롬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근자에 와서는 그것마저 단념하고 있다.)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이들 무채색이 또한 그려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중립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일 색면은 작가의 「행위성(行爲性)」을 억제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중화시키는 롤라작업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롤라는 다시 화면의 텍스츄어(그 텍스츄어는 이미 채색된 물감의 겹친 충에 따라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표면과 동화되는 것이다.
때로 그의 모노크롬 화면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소단위의 네모꼴이 드러난다. 그 네모꼴들은 그러한 모양으로 화면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드러나고」있는 것들이며 바탕으로부터 스며 나오듯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의도된 것들이며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고루 화면을 덮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네모꼴들은 네모꼴이라는 형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형태를 이루는 메워졌다가는 다시 벌어지는 「틈」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그 「틈」들이 바로 화면의 구조적 평면화, 즉 바탕과 그것을 뒤덮은 모노크롬 색면과의 동질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처럼하여 崔明永의 회화는 그대로 「평면구조체」가 되며 그 구조체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의 회화, 바꾸어 말해서 모든 류의 일루젼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장(場)」(field)으로서의 회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자주 예술이란 필경 「인간의 정신과 물질과의 만남」이라고 한 쟈트 마리탱의 말을 되뇌이곤 한다. 崔明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말을 이를테면 말레비치 풍으로 「인간의 감성과 물질과의 만남」이라는 뜻으로 옮겨보는 것이다. 그만큼 崔明永의 회화는 그것이 백색 모노크롬의 것이든 흑색 모노크롬의 것이든 섬세한 감성으로 물들어져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투명한 감성」이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물질너머의 무한한 공간을 그 속에 담고 있으며 그 공간이 또한 우리의 감각을 뛰어넘어 「존재」가 아닌 「생성」의 은밀한 내재율(內在律)을 크게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성」, 바로 여기에 동양적 사유(思惟)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1986. 11
李 逸 (美術評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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