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단조로운 다스림, 그 무한의 변주 - 최명영의 작품세계 2023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 혹은 ‘한국의 단색화’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국적 모더니즘의 얼개와 맥락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주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작가 최명영을 들 수 있다. 1941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군산, 인천 등지에서 성장한 그는 1957년 국립인천사범학교에서 정상화 선생에게 미술 지도를 받았고,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 한묵, 이봉상, 이규상, 김환기 교수의 실기수업과 이경성(서양미술사), 최순우(한국미술사), 조요한(미학), 이기영(불교철학) 교수의 이론수업을 들으며 예술가로서의 바탕을 키워나갔다. 작가는 특히 이규상, 김환기 교수의 예술가로서의 자세에 대한 지도로 본인 예술적 지향에 중요 지표가 설정되었다고 언급했다. 한국적 모더니즘의 흐름을 관통하며 그 연계성을 논할 수 있는 작가들과의 학문을 통한 만남은 작가의 작업 세계 형성에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64년 대학졸업 후 1960년대 후반까지 최명영은 오리진회화협회(1963-1993),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1970-1973), 에꼴드서울(1975-1999), 파리 비엔날레(1967), 상파울로 비엔날레(1969) 등에 참가하며 청년작가로서 미술계 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0년대 초 AG나 에꼴드서울 등의 미술단체 운동과 함께, 1970년대 본격적으로 ‘한국의 단색화’ 흐름 안에서 논의 될 수 있는 자신의 작업 맥락을 형성, 전개해 나갔다. 최명영은 자신의 창작 수행에 대해 “주어진 소재(매체)들에 접촉(반응)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으로서의 행위(조건의 전개)의 다스림”이라고 하며, 이는 “상호침투, 용해되어 텅 빈 공간 속에 투명한 존재성을 들어내게 함으로써 절대조건으로서의 평면의 본질을 규명하려는데 있다”고 언급했다.

최명영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평면조건’이라는 주제 하에 신체를 매개로 캔버스 표면과 물감이라는 질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평면 위에서 신체적 행위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회화의 실존을 파악하고자 했다. 1970년대 중반 작가는 사포작업과 지문작업을 전개했는데, 사포작업은 사포를 이용하여 색면 위를 반복적으로 갈아 표면의 질감이 평면과 맞닿아 스미듯 사라지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지문작업의 경우, 회화 표면 위의 물감을 손가락의 지문으로 끊임없이 문지르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명제를 거의 대부분 〈평면조건〉으로 정돈했다. 그러면서 시기별로 제작방식과 화면 구성방법론에 대한 탐구는 변화와 확장을 거듭했다. 롤러 작업이 그 중 한 그 예가 될 수 있다. 1970년대 중후반 그는 평면 위에 물감을 롤러로 수십 차례 밀어 바르며 물감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화면을 구축했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 초 한지, 송곳작업을 통해서는 침투, 촉각적인 접촉의 감각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제작방식을 탐구하며 회화표면을 통한 작가적 수행을 이어나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를 지나오며 방법론에 있어 작가의 제작양식을 공고히 하는 ‘수직수평의 반복 작업’이 전개되었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업은 “수직(씨줄, 역사)과 수평(날줄, 현실)의 반복적 부침에 의한 생성, 소멸의 실존적 지평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후 2010년대 들어서도 작가는 방법론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며 2014년 이후에는 방안지의 단위면적 위에 손가락을 이용하여 물감을 연속적으로 메꾸는 방안지 드로잉을 선보이는가 하면, 2015년 이후에는 ‘선택과 반복을 통해 물질과 정신의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움직임을 담고 있는 부동을 구축하는 회화적 실존을 구현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캔버스 표면을 드러내는 작업도 실행했다.

작가 최명영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단조로움’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텅 빈 사각의 캔버스 안에 반복적 행위를 통해 균질적으로 구성된 표면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매일 매일 실존을 깨닫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단조로움’은 그 어느 것 하나 동일한 것 없는 무한의 차이를 생성하는 조건이자 태도이다. 캔버스 표면 위에 생성되는 혹은 소멸하는 질료와 행위는 경계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캔버스라는 素地(밑바탕)는 더 이상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닫아버리는 구분이 아니다. 더 이상 정신과 육신이 나눠진 구분의 대상이 아니듯 평면조건은 이제 작가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꿰매고 흐르게 하는 무한 공간을 위한 실존의 ‘장’이다. 그래서 최명영의 예술세계는 ‘단조로움의 다스림’이고 이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무한에의 변주라고 하겠다.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Коментарі


Функцію коментування вимкнено.
bottom of page